화양연화 (아슬아슬함, 순수한 사랑, 배반)
- 공유 링크 만들기
- X
- 이메일
- 기타 앱
왕가위(Wong Kar-wai) 감독의 <화양연화>는 2000년 칸 영화제에서 양조위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입니다.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, 저는 전반부의 그 묘한 긴장감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. 그런데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뭔가 묵직한 불편함이 올라오기 시작했고, 결국 저는 이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눠 기억하게 됐습니다.
아슬아슬함 — 그 팽팽한 선이 이 영화의 전부다
<화양연화>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, 저는 주저 없이 "넘지 않음의 미학"이라고 하겠습니다. 려진(장만옥 분)과 모운(양조위 분)은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, 스스로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애씁니다. 그 억제(抑制), 즉 감정을 의지로 눌러두는 행위가 영화 전반부 내내 화면 가득 출렁입니다.
왕가위 감독은 이 억제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슬로모션(slow motion) 기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. 슬로모션이란 촬영 속도를 높여 실제보다 느리게 재생함으로써 특정 순간의 감정과 질감을 증폭시키는 촬영 기법입니다. 좁은 계단을 스치듯 지나가는 두 사람, 손끝이 거의 닿을 듯한 찰나의 순간들이 느리게 흐르면서, 관객은 그 여백에 자신의 감정을 채워 넣게 됩니다.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몰입한 장면이 바로 그 계단 시퀀스였습니다.
또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인 나탈리 쉐인(Nat King Cole)의 <Quizás, Quizás, Quizás>는 "아마도, 아마도, 아마도"라는 뜻의 스페인어 가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. 어떤 대사 없이도 이 음악 하나가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합니다. 확답하지 않는 감정, 그게 전반부 <화양연화>의 핵심입니다.
순수한 사랑 — 저는 그들이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고 믿기로 했습니다
솔직히 말하면, 려진이 "집에 들어가지 않겠다"고 이야기하는 시점부터 저는 영화에 대한 몰입감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. 그 뒤로 서로 찾아가고, 연락했다가 엇갈리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, 초중반부의 그 팽팽하고 아슬아슬한 감정선에 비하면 무언가 질척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.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. 혹시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이 계신가요?
영화 말미에는 더 직접적인 장면들이 등장합니다. 려진과 모운은 극 중 내내 자신들에게 심적 고통을 줬고, 그래서 그토록 비난했던 바로 그 배우자들처럼 잠자리를 함께합니다. 려진이 모운의 아이로 보이는 아기를 혼자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까지 나옵니다. 제가 느낀 건 씁쓸함이었습니다. 비록 그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전개라 하더라도, 그 장면들은 초중반부가 쌓아올린 순결한 긴장감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.
<화양연화>에서 왕가위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합니다. 영화학(Film Studies) 분야에서는 이 영화를 억압된 욕망(repressed desire)의 서사로 읽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. 억압된 욕망이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판단 때문에 의식 아래로 눌려 표출되지 못하는 감정을 뜻합니다. 그 해석을 따르면, 후반부의 전개는 결국 그 억압이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힙니다. 그런데 저는 그 붕괴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. 제 개인적인 경험상, 선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.
그래서 저는 마치 아직도 <건축학개론>에서 서연이 재욱 선배와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, 려진과 모운이 끝까지 선을 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했다고 믿기로 했습니다. 믿음이 감상을 지켜줄 때도 있습니다.
배반 — 두 사람은 결국 자신들이 비난하던 그 사람이 됐는가
<화양연화>가 불편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도덕적 아이러니(moral irony)를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. 도덕적 아이러니란, 어떤 행위를 비난하던 인물이 결국 그 행위와 같거나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. 려진과 모운은 각자의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상처받고, 그들을 비난합니다.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두 사람 스스로가 그 경계선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.
이 지점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. 과연 그 상황에서 선을 지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?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의지만으로 버텨내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? 왕가위 감독은 이 질문에 낙관적인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.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게 이 영화의 솔직함이기도 합니다.
다만 저는 그 솔직함이 꼭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. <화양연화>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, 특히 수십 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 후반부의 현실적인 전개 때문이 아니라,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그 팽팽한 전반부의 감정 때문이라고 봅니다. Criterion Collection의 분석에서도 이 영화의 핵심을 "욕망의 기하학(geometry of desire)", 즉 감정이 선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구조적 긴장감으로 설명합니다. 저도 그 분석에 동의합니다.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, 긴장감도 사라집니다.
<화양연화>를 둘러싼 해석의 층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.
- 억압된 욕망의 서사: 사회적 규범이 감정을 억누르는 과정 자체를 영화화했다는 읽기
- 도덕적 아이러니: 비난하던 행위를 결국 스스로 반복하게 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탐구
- 상실과 기억: 앙코르와트 장면으로 대표되는, 말할 수 없어서 더 오래 남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
- 시각적 억제의 미학: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드는 왕가위 특유의 연출 방식
이 네 가지 해석 중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영화의 후반부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, 오히려 필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. 저는 첫 번째와 네 번째를 가장 가치 있게 봤고, 그래서 후반부가 아쉬웠습니다.
왕가위라는 감독 — 이 영화는 왜 지금도 유효한가
왕가위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이해하면 <화양연화>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. 그는 단선적 서사(linear narrative), 즉 사건이 인과 관계에 따라 순서대로 전개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해체합니다. 대신 감정의 층위와 질감을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합니다. 이를 비선형 서사(non-linear narrative)라고 하는데,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따라가도록 유도하는 구조입니다.
제가 직접 여러 번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, 초반부를 볼 때와 후반부를 볼 때 영화의 색감과 음악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입니다. 색채 설계(color grading), 즉 영상의 색감과 명도를 조절하는 후반 작업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와 함께 달라지도록 설계돼 있습니다. 초반의 깊고 어두운 적색과 금색 계열이 후반으로 갈수록 더 탁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.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, 저는 그게 감정의 순도가 낮아지는 과정처럼 읽혔습니다.
<화양연화>는 개봉 당시에도, 지금도 영화 비평의 기준점으로 자주 인용됩니다. 영국영화협회(BFI)의 역대 최고 영화 목록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.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이 영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아마도, 말하지 못한 감정이 말한 감정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입니다.
그렇다면 당신은 이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멈췄습니까? 전반부의 그 팽팽함이었는지, 아니면 후반부의 씁쓸한 현실이었는지, 그 지점이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를 결정할 것입니다.
<화양연화>는 완벽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.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. 하지만 전반부만큼은 제가 본 멜로 영화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들로 가득합니다. 그 아슬아슬함 때문에, 저는 이 영화를 계속 기억할 것입니다. 아직 이 영화를 전반부 중심으로 다시 보신 적 없다면, 려진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까지만 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. 때로는 끝을 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남기기도 하니까요.
--- 참고: https://brunch.co.kr/@mchoi31/20- 공유 링크 만들기
- X
- 이메일
- 기타 앱